서 론
연구의 필요성
바람직한 간호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간호사가 되고자 하거나 현재 간호사인 개인, 그리고 간호전문직 집단 모두에게 과제이다. 따라서 간호사 면허 취득 이전의 교육과정과 면허 취득 조건, 이후의 보수교육 등에서 끊임없이 간호사로 적합한 자질과 능력을 갖추도록 여러 장치와 노력이 이루어진다. 바람직한 간호사는 어떤 모습인가에 대한 해답은 다양한 접근을 통하여 제시되지만, 그 중의 하나는 그 구체적인 모습을 ‘귀감’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페베(Phoebe), 플로렌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 같이 윤리적인 면에서나 능력의 면에서나 귀감이 되는 인물에 대하여 어느 점이 뛰어나다, 어느 점을 본받아야 한다 하고 이야기하며 위인화하고 심지어는 영웅시하기도 한다. 그리고 후대의 간호사는 이들의 행적을 조망하여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지침으로 삼는다.
시대와 사회에 따라 다양한 배경과 이유에서 귀감이 되는 간호인물이 선정되지만, 현대 간호직에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나이팅게일 기장(the Florence Nightingale Medal)이 있다. 국제적십자사에서 나이팅게일 탄생 100주년인 1920년부터 수여하기 시작한 이 상은, 2년마다 각국 적십자사에서 후보자를 추천하면 국제적십자위원회(International Committee of Red Cross[ICRC])에서 수상자를 선정한다. 선정 기준은 부상자, 병자, 장애인 또는 공중보건, 간호교육 분야에 있어서 모범적인 활동과 창조적, 개척적인 정신을 함양한 사람이다. 1934년부터는 간호사가 아닌 사람도 수상할 수 있게 되었지만, 나이팅게일을 기려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수상자는 대부분 간호사이다. 2015년에는 전세계 16개국에서 36명이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며, 그간 수상자의 총 수는 1,447명이다.
우리나라는 1957년 제16회 나이팅게일 기장 수상자로 국립마산결핵요양원에서 근무하던 간호사 이효정이 선정된 이후 매회 수상자를 내고 있다. 우리나라 수상자의 수는 회마다 1-3명으로 일정하지는 않은데, 2015년까지 모두 55명이 수상하였다. 나이팅게일 기장 수상자가 선정되면 대한적십자사는 엄숙한 수상식을 주최하고, 대중매체는 연일 수상자의 행적에 관하여 앞 다투어 보도한다. 또한 대통령 영부인을 비롯한 정재계의 인사들이 수상자를 초청하여 그 공을 치하한다. 그리고 간호계에서는 이들을 두고두고 예우하고 칭송한다. 즉, 나이팅게일 기장을 수상한 간호사는 말 그대로 ‘귀감’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간호 인물에 대한 연구가 희박하다 보니, 이들 수상자 중에 당시 대중매체에 보도되는 정도를 넘어서 제대로 연구된 인물은 이금전(Yi, 2013)과 전산초(Mepool Foundation, 2009) 뿐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나이팅게일 수상자들의 경력을 살펴보면 대개 오랜 기간 병원으로 대표되는 임상간호 실무에서 헌신했거나, 간호학 교수로 리더쉽을 발휘하여 간호계에 영향력을 발휘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1991년 나이팅게일 기장을 수상한 박명자는 특이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병원 간호사였고 대학 교수였다는 점은 이금전, 전산초와 같은 다른 나이팅게일 기장 수상자와 비슷하지만, 교련교사와 장학사, 방송통신대학 교육연구관을 거쳐 중학교 교장으로 은퇴를 한 경력은 나이팅게일 기장 수상자중에서 유일할 뿐 아니라 간호사 중에도 드문 것이다. 그렇지만 박명자에 대하여 알려진 것은 나이팅게일 수상 당시 여러 대중매체의 인터뷰에 근거한 경력 위주의 단순한 사실 나열에 그쳐 있다. 즉, 간호사 중에도 특이한 경력을 가진 박명자가 국제적으로 인정받았을 수 있었던 장점이나 덕목은 무엇이며, 이것들은 어떤 배경에서 함양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떤 환경과 활동에서 발현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연구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박명자의 성장과 교육, 간호실무와 각종 활동을 추적하여 구성하는 것을 일차적 연구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그 결과를 기존 연구성과와 비교하여 해석하고 의미를 읽어낼 것이다. 그럼으로써 다양한 영역에서 일하고 있는 간호사들이 지향해야 할 모습을 실례를 통하여 확인하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또한 박명자와 다른 시기와 환경에서 교육받고 일하고 있는 현재의 간호학생과 간호사들이 어떤 능력과 가치관을 갖추도록 지향해야 할지 간호교육이 추구해야 할 바를 제시하고자 한다.
연구 방법
역사학은 문자를 사용한 역사시대의 인간, 인간의 사유, 인간에 의한 사건 등을 대상으로 하며 시간에 따른 변화를 전제로 한다. 역사학의 연구자료는 보통 일차자료(primary sources)와 이차자료(secondary sources)로 나누는데, 일차자료는 보통연구 대상 시기에 만들어진 개인 기록, 단행본, 정기간행물 등이고 이차자료는 연구 대상에 관하여 당대 이후에 이루어진 연구 결과물을 말한다. 전통적으로 역사학에서는 글로 남겨진 일차자료를 수집하여 분석했지만, 20세기 이후 이러한 방법의 연구가 남성 중심, 정치사 중심 등으로 편향되는 단점을 극복하고자 유물, 유적, 사진, 영상, 관계자와의 면담 등의 비문자 자료를 포함하게 되었다.
본 연구의 대상인 박명자에 대해서는 선행 연구가 없기 때문에, 일차자료를 통하여 박명자의 생애를 재구성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였다. 특히 서울대학교 간호대학 간호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거나 박명자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각종 공식 증명서류와 박명자의 논문 및 저서, 그리고 “월간조선”, “경향신문”, “간호신문” 등 각종 신문잡지에 실린 관련기사를 주로 활용하였다. 그리고 2015년 1월 30일 서울시 도봉구 창동의 박명자 자택에서 이루어진 인터뷰와 3월 서신을 통하여 일차자료에서 조사한 내용을 확인 및 보충하였다.
이상을 통하여 1932년에 출생한 박명자가 당시 한국여성 중에는 드물게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가정적 배경과 성장, 간호학생으로 맞이한 한국전쟁이라는 엄청난 시련과 간호장교 되기, 이후 수술분야의 선도적인 활동과 간호관리자로의 성장, 간호대학에서의 교육자 경험, 간호사 출신교련교사와 장학사로서의 역할 찾기, 방송대 교육연구관과 중학교 교장 시절 중점을 두었던 활동, 그리고 평생을 통하여 지속하고 있는 자원봉사에 대하여 파악할 수 있었다. 이러한 객관적 파악을 바탕으로 박명자의 성장과 교육, 현직과 은퇴 이후의 다양한 경력과 활동을 시기별 중점 영역을 중심으로 재구성하였다. 그리고 우리나라 여성교육, 간호교육, 간호실무의 기존 연구결과와 비교, 검토를 통하여 박명자 행적의 의미를 해석하고자 하였다. 주요 이차자료로는 A study on the transition of Korean education for females(Kim, Yang, Heo, & Yoo, 2000), The history of Korean Nursing Corps(The Headquarter of the Army, 1990), Seventy years of Korean Nurses Association(Korean Nurse Association [KNA], 1997) 등을 참고하였다.
연구 결과
서울에서 출생하여 간호학생 그리고 간호장교로 한국전쟁을 겪다
박명자는 1932년 12월 1일 서울에서 아버지 박성옥과 어머니 현순동 사이에서 태어나 3녀 2남의 장녀로 성장하였다(Park, M., personal communication, January 30, 2015). 이화유치원과 한성미동공립보통학교를 거쳐 숙명여자중학교에 입학했지만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가톨릭에서 설립하여 운영하는 계성 여자중학교로 전학하여 졸업하였다. 계성 여자중학교는 1946년 6년제로 인가 받은 중고등 통합 학교였는데, 그 배경에는 해방 후 미군정이 교육제도를 6-3-3-4제로 변경함에 따라 많은 중등학교가 이전의 4년제에서 6년제로 인가를 받으며 명칭을 ‘중학교’로 변경한(Kim, Yang, Heo & Yoo, 2000) 과정이 있었다.
박명자는 1949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고등간호학교에 입학하였다. 간호학교에 입학한 이유는 성장하면서 바라본 양호선생님과 적십자병원 간호사의 모습이 너무 좋아 장래희망으로 간호사를 꼽고 있었기 때문이었다(Kim, 1992).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고등간호학교는 1946년 7월 미군정이 보건 후생부 통첩으로 기존의 간호부조산부양성소를 폐지하여 ‘고등간호학교’로 개칭하고 중학교 졸업자를 입학 자격으로 하여 3년 과정으로 하면서 간호과와 조산과의 교과내용을 동시에 이수하여 간호원과 조산원 두 가지 면허를 주게 한 것을 설립과 운영의 근거로 하여 1946년 8월 미군청령 122호에 의하여 시작되었다(College of Nursing Seoul National University, 1997). 간호학교 학생은 모두 기숙사 생활을 하는 규정에 따라 박명자는 입학과 동시에 기숙사에 입사하였다. 그리고 서울대학교 학도호국단의 교기 기수로 뽑혀서 훈련에도 참가하고, 의과대학 및 타 단과대학의 여러 학생과 친분을 쌓는 등 적극적으로 학교생활을 하였다(Park, M., personal communication, January 30, 2015). 교과과정은 1946년 미군정청에서 하달한 ‘고등간호학교 간호원조산원 교과과정표’를 기준으로 이루어졌는데, 1학년은 교양과목으로 국어, 영어, 음악 등을, 그리고 전공과목으로는 영양학, 약물학, 해부 및 생리학, 세균학, 약물 조제학, 간호사, 개인위생학, 간호도덕, 붕대학, 내과간호, 외과간호 등을 배웠다. 입학 후 6개월이 지나면서 가관식을 하고 임상실습을 시작하였다(College of Nursing Seoul National University, 1997).
1학년을 마쳐가던 1950년 6월 25일 오후, 박명자는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학교로 가서 간단한 외상용 처치도구를 준비하여 다른 학생 30여명과 트럭에 나누어 타고 전선으로 향했다. 그렇지만 서울 북쪽에서 도로가 막혀 되돌아 올 수밖에 없었고, 이튿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에서 부족한 일손을 돕기 시작하였다. 28일 북한군이 서울로 진입하면서 부속병원을 점령하였고, 박명자는 병원에 남아있던 다른 직원, 학생과 함께 북한군의 지시에 따라 병원 운영을 돕게 되었다. 마침 수술장 열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수술장 업무 보조와 환자 간호 등을 주로 하였고, 병원에서 벌어진 인민군과 국군 부상병의 교전을 목격하기도 하였다(Kim, 1999).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북한군은 서울대학교 부속병원의 인력과 시설의 반을 북한 지역으로 보내 부족한 의료에 활용하고자 하였다. 박명자는 북으로 후송되던 도중에 탈출에 성공하여 수차례 생명의 위험을 겪으며 서울로 돌아왔다. 그렇지만 도렴동 집은 폭격으로 무너지고 아버지는 납북되는 등 유복했던 가정은 다음 끼니도 보장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박명자는 1.4 후퇴에 따라 부산에 가서 제5육군병원에서 전상자 간호 업무를 보조하다가 1951년 서울에 돌아와서는 제36육군병원의 일을 도왔다. 그러던 중 간호사관생도 모집공고를 보고 경제적으로 어렵던 처지에 중단된 간호교육도 받을 수 있고 숙식을 보장하는 이곳에 지원하였다. 제36육군병원에서 일하면서 알고 있던 최보배 간호과장의 추천으로 수월하게 입학할 수 있었다(Kim, 1999; Noh, 1992).
1948년 대한민국 출범과 더불어 시작된 간호장교제도는 채 자리가 잡히기도 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인력이 심각하게 부족한 상태였다. 대한민국 군대에서는 한편으로 민간병원 간호사를 현지임관 형식으로 간호장교로 보임하여 일선에 투입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육군 군의 학교에 간호사관생도 과정을 개설하여 늘어난 수요를 충당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한국전쟁기 피난지 부산과 마산에서 이루어진 간호장교 교육의 물리적 여건은 좋을 수 없었지만, 교수와 학생의 인적 자원은 훌륭하였다. 유명한 의사 중에 상당수가 징집영장을 받고 육군 군의관에 임명되어 간호사관학교에서 교육에 종사했으며, 학생도 전시연합고등학교와 연합대학과정 재학생이 많았다(The Headquarter of the Army, 1990, 2009).
박명자는 1952년 5월 12일 간호사관생도 2기생으로 입학하였다. 지원 자격은 초급 여자중학교 졸업 이상 17세에서 25세까지의 여성으로 국어, 수학, 논문의 필기시험과 신체시험, 그리고 구두시험을 통해 선발되었고, 경남 동래의 징발한 학교에서 교육이 시작되었다. 간호사관생도 과정을 입안할 때에는 일반 고등간호학교처럼 교육연한을 3년으로 계획했지만 전쟁 중에 부족한 간호인력을 시급히 보충할 필요성 때문에 그 기간을 2년으로 단축하였다. 단 2년간에 6,000시간의 교육을 이수하도록 하자니 아침 6시에 기상하여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 정규수업을 하고 10시에 소등하는 강행군이 이어졌다. 교과과정은 크게 일반학 및 전공학 2,940시간, 간호학 임상실습 2,358시간, 전술학 실습 146시간, 기타 실습 316시간으로 구분되었다(The Headquarter of the Army, 1990, 2009). 여타 간호학교 교과과정과 가장 큰 차이가 있는 부분은, 군 장교의 자격을 갖추도록 전술학 이론 282시간과 실습 146시간을 이수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 교과과정에 따라 1기생을 교육을 실시해 보니 간호장교후보생 신분으로 병원 실습을 하면 전상환자 간호가 어렵다는 문제점이 드러났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2기생부터는 교과과정 1년 이수 후에 일단 소위로 임관하여 각 병원에서 1년의 임상실습을 하도록 하고, 그 후 간호사 자격시험에 합격한 자를 졸업시키는 등 전시 상황을 반영한 파격적 운영을 하였다. 이에 따라 제2기 입학생 134명중 고된 1학년 과정을 성공적으로 이수한 123명이 1953년 3월 28일 소위로 임관되었다. 이들은 각각 배치된 병원에서 1년간 실습이자 실무를 수행한 후 간호사 면허시험을 보았고 합격자 117명이 졸업장을 취득하였다(The Headquarter of the Army, 1990, 2009).
박명자 역시 입학한지 1년 후인 1953년 3월 28일 간호사관생도 기초학과를 수료한데 대한 증명서를 받았다. 그리고 대한민국 육군의 소위로 부산의 제3육군병원으로 부임지를 배정받았다. 당시 제3육군병원은 간호사가 없이 의사와 환자만으로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에 간호사관생도 2학년인 박명자는 간호관리자나 선배 간호사의 지도 없이 간호 실무를 수행하면서 간호관리자의 역할도 해야 했다(Park, M., personal communication, January 30, 2015).
박명자는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 전쟁으로 학업이 중단된 서울대학교의과대학 부속 간호학교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한국전쟁을 겪으며 부족한 간호인력 보충을 위하여 간호사 검정고시가 다시 시행된 것처럼, 간호학제 역시 하향변화를 겪은 이후였다. 1951년 중등교육제도가 3년제 중학교와 3년제 고등학교로 분리되었고 ‘간호고등기술학교’는 3년제 중학교 졸업생이 입학할 수 있는 일종의 고등학교가 되었으며,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고등간호학교 역시 1953년 간호고등기술학교가 된 것이다. 1956년 3월 15일, 문리대 강당에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간호고등기술학교 제5회 졸업식이 이루어져 37명이 졸업했는데(College of Nursing Seoul National University, 1997), 이날 박명자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간호고등기술학교에서 3년간 소정의 과정을 수료하였다는 졸업증서를 받았다.
대학병원 간호사로 수술 및 마취간호를 개척하다
박명자는 수도육군병원에서 근무하다가 1956년 육군 중위로 전역하였고 곧바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 수술장에서 근무를 시작하였다. 당시 서울대학교병원의 마취방법은 대부분 국소침윤 또는 척추마취였고, 전신마취는 에테르를 사용한 개방점적식 마취법을 사용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었으며, 마취과가 외과 소속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Seoul National University Department of Anesthesiology and Pain Medicine, 2008). 그러나 한국전쟁기 군병원에서는 이미 새로 개발된 마취기, 기관내 튜브(endotracheal tube), 후두경(laryngoscope)을 도입하고, 마취에 N20, 유도마취에 펜토탈(pentothal)과 근육이완제(muscle relaxant. 주로 D-tubocurarine)를 사용하였으며, 에테르 주입법(ether insufflation method) 등 발전된 마취술을 시행하였다. 이외에도 지속요추마취, 천골마취 등의 신기술을 소화, 발전시킨 상태였다.
박명자 부임 당시 서울대학교병원은 수술실을 2개 운영하고 있었는데, 맹장수술 환자의 가족이 입던 옷과 신발 그대로 수술실에 들어와 수술 광경을 참관할 정도로 무균술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박명자는 환자 가족이 참관할 때에는 수술 가운을 착용하고 신발을 갈아 신을 것 등 무균술의 준수와, 수술 후에는 별도의 회복실이 설치 및 운영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병원에서 예산 부족을 이유로 난색을 표시하자 박명자는 자비로 참관인용 신발을 사다 놓고, “수술실 옆의 창고 같은 방을 청소하고 침대와 이불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곳에 환자를 눕혀놓고 회복을” 기다려서 회복실을 시작하였다(Noh, 1992). 이후 병원에서 마취를 위하여 미화 약 5만불 가량의 장비를 도입하여 마취 시설과 회복실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게 되었다. 박명자는 또한 간호학생, 의과대학생 등을 상대로 수술 및 마취에 관한 교육과 실습지도를 담당하기도 하였고, 전국 각지의 병원에서 요청이 있을 때 마다 방문하여 수술장 및 회복실 설치에 도움을 주었다.
박명자는 서울대학교병원과 여러 간호학교에서 교육을 하면서 사용하던 수술 및 마취에 관한 책을 이분야 최초의 우리말 단행본으로 정식 출판하여 교육과 실무에 활용하였다. 1966년 김숙진과의 공저인 “간호원을 위한 수술실 수기 및 마취"가 그것이다. ‘저자의 글’에서 책을 낸 이유를 “수술실수기 실습 중에나 학생을 지도하는 교사의 입장에서나 오랫동안 우리말로 엮어진 ‘수술실 수기’의 책자가 없어 불편도 있고 못내 아쉬웠습니다”라고 밝혔고, 책을 낼 때 가장 큰 어려운 점이 우리말 의학용어가 개발되어 있지 않아 적합한 우리말을 찾거나 만들어 바꾸는 것이었음 역시 기술하였다. 또한 “서울대학교병원 및 기타 병원의 시설과 경험을 살려 한국적인 실정의 배려라는 점을 잊지 않았습니다”(Park & Kim, 1966)라고 한 것처럼 우리나라 병원 현실에서 실제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책이었다.
이 시기에 박명자는 사회활동을 시작했다. 그 중 하나는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이고 다른 하나는 자원봉사활동이었다. 박명자는 1958년 1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의 가톨릭간호사 10명과 함께 가톨릭노동청년회에 대한 소개책자를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이 회합이 우리나라 가톨릭노동청년회의 시작이 되었다(Institute of Korean Catholic Church History[IKCCH], 1985) 또한 전후 극도로 피폐한 경제상황에서 버려진 쓰레기를 주워 파는 소위 넝마주이를 따라갔다가 그들이 집단으로 모여 사는 ‘개미마을’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박명자는 일과 후에 이곳을 정기적으로 방문해 한글교육과 보건교육을 하기도 하였고(Noh, 1992), 서해안 무의 도서 지역을 연2회 방문하여 의료봉사를 하기도 하였으며, 산청 나환자 수용소를 주말마다 찾아가 봉사를 하기도 하는 등(Kim, 1991), 틈나는 대로 봉사활동을 하였으며 이러한 자원봉사는 이후 평생을 두고 이어졌다.
간호교육자로 후학 양성에 헌신하다
박명자가 간호교육자로 첫발을 내디딘 곳은 성요셉 간호고등기술학교였다. 성요셉 간호고등기술학교가 1954년 설립인가를 받고 출범할때부터 박명자는 가톨릭 신자라는 인연으로 강의를 시작하여, 학교가 가톨릭대학 의학부 간호학과로 승격한 이후까지 9년간 간호학생을 가르쳤다.
박명자는 간호교육 수준 향상에 발맞추어 자신의 교육 능력을 함양하기 위하여 중앙대학교 교육학과에 진학하여 1959년 학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리고 서울대학교에서도 정식으로 학생 교육을 담당하여 의과대학 간호학과 임상강사, 그리고 의과대학 시간강사를 역임하였다.
박명자는 1962년 인천간호고등기술학교의 전임교원이 되었다. 당시 인천간호고등기술학교는 인천도립병원 부설이었는데, 부임하자마자 학교의 재정적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다각도의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기숙사 식당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내보내고 직접 장을 보고 밥과 반찬을 만들어 학생들의 식사를 마련해 주었다. 그 결과 수개월 후에는 학생 식비와 관련된 빚을 갚을 수 있었고, 이에 감동받은 학생들은 조를 짜서 직접 취사를 담당하기도 하였다(Park, M., personal communication, January 30, 2015). 당시 박명자는 어머니와 동생들의 생계와 교육을 책임지는 가장이었지만, 교수로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외면할 수 없어 한학기당 1명씩 개인적으로 장학금을 지급하기도 하였다(Kim, 1991).
박명자는 학교의 예산 운영이 인천시립병원과 별도로 이루어지도록 하였고, 간호학교로의 승격을 추진하여 인천간호고등기술학교는 경기간호학교로 승격하게 되었다. 또한 경기도 지사에게 학교 현황을 보고하며 교육용으로 별도의 건물 신축을 얻어내기도 하였다. 박명자는 이외에 철도간호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기도 하였고, 1968년부터 1972년까지는 서울간호전문학교에서 재직하기도 하였다.
이시기 박명자는 간호전문직단체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대한간호협회 경기지부를 활성화하기 위하여 경기도 각 보건소와 병원을 순회하며 회원을 만나고 설득하여 1962년에는 전회원이 참석하는 총회를 개최하였고, 회비 징수도 시작하였다. 그 결과 대한간호협회 경기지부는 활성화될 수 있었고, 박명자는 1966년까지 지부장을 역임하였다(KNA, 1997).
다시 병원으로 돌아와 간호행정 체계화에 힘쓰다
박명자는 1966년 서울대학교병원으로 돌아와서 다시 수술장 업무에 종사하였다. 당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은 국내 최고 수준의 병원으로 점점 중환자가 늘어나 간호인력의 수요와 어려움은 커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간호사 정원이 정부의 제한에 묶여 12시간 맞교대 근무를 하는 형편이라, 업무의 효율은 떨어지고 환자와 의료진 모두 불만이 큰 상황이었다. 박명자는 문제의식을 공유하던 동료 간호사와 함께 간호사가 근무시간에 하는 일을 하나하나 나열하고 그에 소요되는 시간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를 토대로 서울대학교 병원 간호인력 부족을 정부 관계자에게 설명하여 간호인력 충원을 얻어냈다(Korea Red Cross [KRC], 1991). 그 결과 간호사의 3교대 근무가 시작되었고, 이브닝 감독, 나이트 감독, 수술장 감독 등 근무별 및 특수파트별 간호감독 제도가 시작될 수 있었다(Park, M., personal communication, January 30, 2015).
박명자는 유사한 방식으로 간호조무사의 업무도 분석하였고, 이를 논문으로 발표하였다. 당시 서울대학교병원 등 대부분의 의료기관에서 간호조무사 역시 낮번과 밤번으로 나누어 1일 2교대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박명자는 “간호보조원의 근무 실태를 조사하여 불필요한 일에 시간을 낭비함이 없이 환자 간호와 병실 관리에 좀 더 유효적절한 시간을 이용하기 위함”으로 “서울대학병원의 13과에서 근무하는 간호보조원들의 매일의 일과를 기록하여 time and motion study"를 하였다. 구체적인 연구 방법으로는 “각 과별로 모든 간호보조원의 근무시간 중 계속해서 작업이 바뀔 때 마다 작업의 내용, 작업에 소요된 시간, 작업의 장소를 기록케 하였다”(Park, 1968). 그리고 낮번과 밤번이 가장 많이 하는 일을 각 18가지와 16가지 선정하여 일에 소요되는 시간과 회수를 산출하였다. 그결과 청소 및 정돈, 심부름, 보리차 운반 등의 일 각각에 대하여 현재의 업무 효율을 개선시키는 방법을 일대일로 제안하였다. 또한 서울대학교병원에서 개선된 점과 개선되지 않은점을 모두 제시하여 타 병원에서 병원 간호조무사 업무의 효율을 높이는데 참고가 될 수 있도록 하였다.
박명자는 1968년 개원을 준비하고 있던 고려병원의 첫 간호부장으로 부임하였다. 병원의 최고 간호관리자로 각종 시트류는 자체 제작하도록 하여 경비를 절감하도록 하였고, 간호 인력은 각 병원과 학교의 추천을 받아 다양한 배경의 우수한 인재로 충원하였다. 또한 신규직원 채용부터 보수교육을 실시하는 교육감독제를 신설하고, 전국 각 의료기관에서 자료를 수집하여 타당한 보수규정을 마련하는 등(KRC, 1991) 간호관리자로 물품과 간호인력 관리의 기틀을 개발하여 운용해 나갔다. 또한 보건행정에 대한 시야를 넓히고 관리자의 능력을 개발하기 위하여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에 진학하여 1971년 보건학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교련교사로 교련교육 내용을 개발하고 장학사로 청소년 지도에 앞장서다
간호교육 경험이 길어지면서 새로운 도전의 기회를 찾고 있던 박명자는 1971년 취득한 중등학교 교련과 준교사 자격을 기반으로 1972년 3월 서울 중경고등학교에서 중등교원의 첫발을 내딛었다. 부임하자마자 학생 중에 가정 형편과 이른 등교로 아침을 먹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를 해결하고자 사비로 미숫가루와 설탕을 준비하여 학생들이 자유로이 먹을 수 있도록 하였다(Park, M., personal communication, January 30, 2015).
박명자는 4월에 무학여고로 교련교사로 발령받았다. 1968년 1.21 사태 이후 안보의식과 전시상황에서의 대처능력을 높인다는 목적 하에 1969년 교련이 고등학교 필수교과목으로 지정되었지만 교육내용이 완비되지 않아 제식훈련을 위주로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전쟁을 경험한 간호장교 출신인 박명자는 고등학교 교련에서 무엇을 가르치면 좋을지를 고안하여, 전시에 대비한 응급처치 및 대량전상자 관리방법을 학교 민방위훈련에서 시범 보여 교육부로부터 교육적 가치를 인정받았다(KRC, 1991). 이것이 계기가 되어 문교부에서 각 교육위원회에 내려 보낸 고교교련지침에서, 여자의 경우에는 “구급법, 간호교육, 화생방훈련, 방공훈련을 실기하는 외에 위생 및 보건교육과 함께 조회 및 학교행사를 응용한 단체훈련을 실시”하도록 하였다(KNA, 1997).
박명자는 학생들의 진로 지도에도 노력하였다. 교련교사로서는 드물게 고등학교 3학년 담임을 맡기도 하였고, 직업반을 만들어 학생들이 경제적으로나 직업적으로 졸업 후를 준비하도록 하였다. 즉, 개인적으로 업체를 섭외하여 물품을 생산하고 남은 뜨게실을 얻어다가 직업반 학생들에게 뜨개질을 가르친 것이다. 그리고 학생들이 틈틈이 스웨터 등을 제작하여 판매하도록 하고, 판매 대금을 학생 개인별 통장에 입금하여 졸업할 때 졸업장과 함께 수여하였다. 또한 매년 2명씩을 선정하여 개인적으로 장학금을 지급하였다(Kim, 1992; Noh, 1992).
박명자는 1977년 서울시 장학사로 임용되었다. 장학사의 역할은 소속 교육청 관할 교육 과정, 교재 연구, 학교 평가 등 현장 교육에 필요한 일을 지도, 감독하고 조언하는 것이었고, 박명자의 담당 업무는 학무국 중등교육과 생활지도였다. 1970년대 후반은 한국 사회 전반에 ‘새마음운동’이 한창 전개되고 있을 때여서 박명자는 퇴근 후에도 학교 밖을 순회하여 문제학생과 가출학생 등을 발견하여 지도하고 집으로 돌려보냈다(Noh, 1992). 또한 학교보건을 담당하는 보건교사의 보건교육강화, 경제 및 권익 향상을 위해 호봉정책을 상신하여 성취되도록 하였다(KRC, 1991). 또한 1974년과 75년 서울시 간호사회 학교간호분과위원을 지내기도 하였다.
박명자는 교련교사와 장학사로 일하면서 방학을 이용하여 정부에서 실시한 재일교포학생 하계단기교육 지도교사로도 활동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초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일본어에 상당히 능통했지만, 재일교포학생과 더욱 원활히 의사소통하면서 지도할 수 있도록 국제대학 일본어학과를 편입학하여 졸업할 정도로 학생 지도에 열심이었다. 예를 들어 1975년 여름에는 재일동포 여학생 80명을 인솔하고 육군여군단에 1일 입소하여 제식훈련, 구급법, 화생방, 사격술 등 기초 군사훈련을 받도록 하기도 하였다(“Eighty Korean-Japanese female students”, 1975). 그 결과 1982년에는 “재외교포 모국방문 고등대학생들의 춘하계학교의 지도교사로 여러해 종사해온 6명의 여교사”중의 단장으로 일본 동경, 오사카, 후쿠오카 일원의 해외연수를 다녀오기도 하였다(Seoul Board of Education, 1982).
방송대 교육연구관으로 간호교육 일원화의 발판을 마련하다
박명자는 1985년 한국방송통신대학 방송통신교육연구소 교육연구관으로 발령받았다. 방송통신교육연구소는 일반 대학과 다른 수업방법으로 어려움을 겪는 방송통신대학 학생에게 도움을 주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었다. 박명자는 이곳의 교육연구관으로 1985년 10월에서 1986년 5월까지 8개월동안 2,455명의 학생이 찾아오는 실적을 올리고, 학생 상담을 기반으로 방송통신대학생의 자아실현과 그 성취에 관한 연구를 서울대학교 이소우 교수와 공동 발표하였다(Lee & Park, 1987).
1960년대 초부터 대한간호협회를 통하여 간호전문직 발전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던 박명자는 협회의 연구비 지원을 받아 방송통신대학에 간호학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는 편입과정을 만드는 방안 연구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한국방송통신대학 간호학 교육과정 개발에 관한 연구”를 보고서로 냈고(Park, 1985a), 간호계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정기간행물 “대한간호”에 ‘방송통신대학제도’ 라는 글을 기고하는 등(Park, 1985b), 전문대학의 3년제 간호과 졸업생이 방송대 편입을 통하여 간호학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방송통신대학제도’는 “한국방송통신대학 간호학 교육과정개발에 관한 연구”를 기반으로 한 글인데, 당시 “간호원 면허소지자의 80% 이상이 전문대학 또는 간호고등학교 출신이며 해마다 약 6,000명의 간호원이 배출되는데 이중 약 5,000명의 간호원이 전문대학출신”이기 때문에 “모든 간호원의 교육수준을 4년제 대학과정으로 향상시키는 일이 시급하다”고 강조하였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간호교육 수준을 4년제로 단일화하는 일이 많은 시간을 요하므로 이러한 노력의 과정 속에서 방송통신대학에 간호교육과정을 설치하는 것이 바람직한 전략”(Park, 1985-a)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어서 한국방송통신대학의 연혁, 설립목적, 교육과정, 학과, 교육체계, 학사 등을 분석하고 간호전문대학과 간호고등학교 출신 간호사들의 계속교육에 대한 요구가 강렬하고 간호전문직을 성장시키려는 열의가 팽배되어 있기 때문에 국민 평생교육을 위하여 설립된 방송통신대학에 간호교육과정이 개설되어야 한다는 근거를 제시하였다. 이러한 연구와 간호계의 노력을 기반으로 1991년 방송통신대학 간호학전공이 출범하여 간호교육 일원화의 가장 큰 물꼬가 트이게 되었다.
박명자는 방송통신대학에 근무하면서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보건간호 이수과정 외래교수로도 활동하였고, 서울시 간호사회 북부분회장, 이사, 실행이사, 기획관리위원, 그리고 보건간호사회 이사와 제2부회장을 역임하였다.
최초의 중학교 보육실을 만들고 은퇴 이후 사회봉사에 헌신하다.
박명자는 1993년 5월 서울 석관중학교 교장으로 발령받아 교사들에게 가장 시급한 어려움이 육아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석관중학교 교사 80여명 중에 여교사가 60명 가까이 되는데 이중 1년에 10여명이 출산을 하면서 육아문제에 직면하고 있었지만 제도적 해결책은 전무한 상태였다. 박명자는 곧바로 학교에 보육시설을 만드는데 착수하였다. 공간 문제는 20평 규모의 빈 교실을 개조하여 해결하였고, 비용 문제는 학교와 시설 이용 교사의 공동 부담으로 해결하였다(Jung, 1995). 그 외에도 체육관을 보수하며 보수과정과 비용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등, 학교 운영을 개선해 나갔고, 이러한 박명자의 활동은 교사들의 마음을 움직여 정년퇴직할 때에는 이례적으로 송시를 헌정 받기도 하였다(Kim, 1998).
박명자는 서울대학교병원에 근무하던 1950년대 후반부터 내내 다양한 자원봉사를 해 왔지만, 1998년 은퇴 후에는 본격적으로 자원봉사에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다. 그중에도 임종환자가 인생의 마지막을 평화롭게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돕는 호스피스 봉사, 옷을 만들어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무상으로 제공하는 봉사, 그리고 관절염의 예방과 치료에 도움이 되는 건강 타이치 운동치료의 교육 봉사 등 세 가지 봉사 활동에 가장 노력을 기울였다. 먼저, 호스피스 봉사는 본인이 1997년 악성 뇌종양으로 대수술을 받고 재활의 과정을 거친 경험을 바탕으로 시작하였다. 2000년에는 정식으로 호스피스 교육을 받았고 이후 꾸준히 춘천시립양로원 등 여러 시설과 가정의 호스피스 대상자를 방문하여 삶의 마지막 과정을 도왔다.
소위 ‘옷봉사’는 천을 기증받아 생활복 등을 만들어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이었다. 재료는 여러 관련 업체로부터 기증받은 자투리 천을 활용하였다. 석관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던 1995년부터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입을수 있는 옷을 만들어 무상으로 나누어주기 시작했는데, 특히 은퇴 이후에는 다른 자원봉사자의 도움을 받아 하루에 수십벌씩 옷을 제작하여 전국의 양로원, 고아원, 나병환자 수용소 등에 기부하였다. 봉사의 대부분이 직접적으로 금전이나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치우쳐 있던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기부용 옷을 만들어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은 새로운 것이어서 여러차례 매스컴에 소개되었고, ‘옷 짓는 할머니’라는 별칭이 생기기도 하였다(Gwak, 2003; Jeon, 2003; Shin, 2002).
또 다른 중요한 봉사인 타이치 운동 교육에 대하여는 서울대학교 간호대학 이은옥 교수를 통하여 알게 되었다. 타이치 운동은 고대 중국무술 형태의 일종인 태극권을 관절염의 예방과 치료를 돕기 위해 운동방법으로 변형시킨 건강체조로, 박명자는 2005년에는 호주에 가서 타이치 교육을 받고 마스터 트레이너 국제사범 자격을 취득하였다. 이후 용산구 보건소, 포천시 보건소, 양주시 보건소, 서울시 창5동 주민센터, 과천시 보건소 등 요청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타이치 강사로 봉사하였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타이치 운동 교육봉사를 통하여 지역사회 주민의 건강 증진에 기여한 공으로 호주에 본부를 둔 타이치 건강협회와 여러 지역사회로부터 상을 받기도 하였다.
2002년 한 기자가 만난 박명자의 일과는 다음과 같다.
“새벽 3시 기상. 기상 후 1시간 기도. 15명 정도의 노숙자를 위한 밥을 해 놓고, 새벽미사를 다녀오면 6시 45분. 도시락을 싸서 경비실에 맡겨 놓는다. 그리고 달력에 표시된 대로 요일을 정해 봉사를 다니고, 저녁 9시면 잠자리에 든다. 월, 병원 암 환자 방문, 화, 마포종합복지관 운동 및 관절염 강의, 수, 춘천시립양로원 방문, 목, 아프리카선교회 방문, 금 호스피스 봉사, 토, 군부대 방문, 일, 특별요청 방문”(Shin, 2002).
이렇게 매일 남을 위하여 봉사하는 박명자의 생활은 2015년 1월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이상과 같은 박명자의 연도별 주요 경력과 활동을 표로 만들면 아래 표와 같다(Table 1).
<Table 1>
논 의
1932년 서울에서 출생한 박명자는 우리나라 여성으로는 드물게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거쳐 6년제 중등학교를 졸업하고 간호학교에 진학하는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에게 특히 여성에게 ‘학교’는, 경제적인 어려움과 문화적인 성차별, 학교 자체의 희소성 등으로 다니기 힘든 곳이었는데, 해방 직전인 1944년 남조선 여성 중에 초졸이 2.7%, 중졸이 0.3%에 불과하고 미취학이 91.2%였으며, 1945년 해방 직후 성인 비문해율이 80%를 상회할(Kim et al., 2000) 정도였다. 박명자가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서양의 교육과 종교를 일찍 받아들인 집안에서 성장했기 때문이었는데, 이것은 일제시대 우리나라 간호계의 리더 역할을 했던 1896년생 정종명(Yi, 2012)과 1902년생 한신광(Yi, 2006), 1900년에 태어나 1959년에 나이팅게일 기장을 수상한 이금전(Yi, 2013), 1921년에 태어나 1983년에 역시 나이팅게일 기장을 수상한 전산초(Mepool Foundation, 2009) 모두 마찬가지였다. 인접한 중국 및 일본 이외의 국가와의 수교를 1876년에야 시작한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개화한 집안의 여성은 일반 여성보다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는 기회를 가짐으로써 리더로 성장할 발판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박명자는 1949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고등간호학교에 입학하여 1947년 12월 말 전체 2만명 남짓에 여학생 수는 3,402명(Kim et al, 2000)에 불과했던 고등교육에 발을 딛게 되었다. 박명자 재학 당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고등간호학교는 의과대학 소속 학과로 간주되었다. 그 배경으로는 부속고등간호학교 학생이 다른 서울대학교 학생과 마찬가지로 중등교육 졸업자이고, 여성의 고등교육 진학률이 매우 낮아 여대생이 희소했으며, 대한의원 시절부터 의학과와 함께 출범한 것 등이 작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래서 부속고등간호학교 학생들은 매주 월요일 아침 문리대에서 열린 서울대학교 전체 학생 조회에도 참석하였고, 서울대 여학생의 교복과 뱃지를 착용했으며, 서울시 여대생 체육대회에 서울대학교 여학생 대표로 참석하였고, 의과대학 학생과 혼성합창단을 구성하여 공연을 하는 등 동아리 활동도 함께 하였으며, 서울대학교에 결성된 학도호국단에도 참여하였다(College of Nursing Seoul National University, 1997).
유복하고 교육열이 높은 집안에서 성장하여 순탄하게 최고 수준의 교육과정을 밟고 있던 박명자의 삶은 간호학교 1년 과정을 마친 1950년 6월 한국전쟁을 맞이하면서 급변을 겪었다. 북한군 점령 하의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일하다가 이북으로 끌려갔고, 탈출하는 과정에서 여러번 생사의 위기와 결단의 순간을 맞이하였다. 1952년 육군군의학교 간호사관생도 과정에 입학하여 만 열아홉에 간호사관생도 2학년이자 소위라는 신분으로 부산의 육군병원에서 선배 간호사의 지도감독 없이 근무 겸 실습을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한국전쟁을 병원과 전선에서 겪으며 아군과 적군을 간호하고 생사를 넘나들었던 경험, 그리고 학생이지만 간호장교로 선배 간호사의 지도감독 없이 군병원의 간호를 책임지고 수행해야 했던 경험으로 박명자는 절실한 박애사상과 소명의식, 그리고 결단력과 추진력을 갖출 수 있었다. 또한 당시 미군이 한국 간호장교에게 선진 수술과 마취 교육을 제공했기 때문에(The Headquarter of the Army, 2009) 박명자는 간호사로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도 가질 수 있었다.
한국전쟁은 우리 민족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으로, 간호계에서는 박명자 이전 세대이면서 당시 중년이었던 이금전과 한신광이 각각 전시 간호학교의 행정 책임자이자 세브란스병원 간호원장(Yi, 2013), 부산의 부녀사업 과장(Yi, 2006)으로 지도자적 역할을 하였고, 서른살이었던 전산초는 간호 교육과 실무 경력을 살려 피난지 제주에서 지역 주민들에게 보건교육과 의료활동을 하였다(Mepool Foundation, 2009).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간호장교 중 한명이었던 조귀례는 전쟁 내내 여기 저기 육군병원에서 부상병을 간호했고(Moon, 2007), 박명자와 학교는 달랐지만 마찬가지로 간호학생이었던 이종선도 북한군이 점령한 병원에서 일을 하다가 강제로 북한지역에 끌려갔다가 탈출하는 경험을 하였다(Lee, 2000). 이들은 세대에 따라 전쟁을 지도자로 겪었느냐, 실무자로 겪었느냐, 학생으로 겪었느냐의 차이는 있었지만 모두의 공통점은 전쟁의 한복판에서 부상병과 피난민을 위하여 봉사하며 큰 위기를 극복한 경험이 이후 간호사로 일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이겨내고 목적을 달성하는 자산이 되어 되었다는 점이다.
박명자는 1956년부터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에서 수술 및 마취 간호사로 일하면서 간호장교 시절에 익힌 선진 지식과 기술을 실무에 이식하는 과정에서, 개선되어야 할 점을 먼저 찾아내어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방식으로 일을 수행하였다. 무균법을 확대하고 회복실을 설치하는 과정이 누구의 지시나 과제 부여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본인이 문제점을 발견하여 해결책을 제시하거나 직접 해결하는 방식이었다. 또한 수술 및 마취 교육에도 앞장서서 반세기 후에도 “부속병원 마취과의 초창기에는 한국 전쟁 후 군에서 마취보조 간호장교로서 많은 경험을 쌓고 제대한 박명자 간호원이 마취회복실 수간호사원으로서 마취과 선생들을 음양으로 도왔으며 수술장 및 회복실의 간호 일선에서 오랫동안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Seoul National University Department of Anesthesiology and Pain Medicine, 2008)고 평가받을 정도였다. 또한 1966년 공저로 출판한 “간호원을 위한 수술실 수기 및 마취”는, 우리말로 된 최초의 수술실과 마취에 관한 단행본이었으며, 우리나라 보건의료와 병원 현실을 반영한 책이었다. 이 책은 이후 20여년 간 수술 및 마취 분야의 독보적 우리말 교재로 교육과 실무에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1950년대와 60년대 마취의사가 거의 없던 시기에 박명자 뿐 아니라 역시 간호장교로서 교육받아 초기 마취간호사로 활동했던 이종선(Lee, 2000) 등 간호사가 기여한 역할은 매우 컸다.
박명자는 1954년 성요셉 간호고등기술학교에서 교육자로서 첫발을 내딛은 이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간호학과 시간강사를 거쳐 인천간호고등기술학교의 전임교원이 되었고 철도간호학교, 서울간호전문학교 등에서 간호교육에 종사하였다. 박명자가 간호교육자로 활동한 1950년대와 1960년대는 우리나라 간호교육 제도가 중졸자를 입학시키는 간호고등기술학교 이상에서 고졸자를 입학시키는 간호학교 이상으로, 즉 중등교육기관에서 고등교육기관으로 전환한 시기였고 이 시기 간호교육자의 최대 과제는 간호교육 수준 향상에 부응하여 자신과 학교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박명자는 몸담고 있던 간호고등기술학교를 간호학교로 승격시키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고, 학생 교육에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직접 장을 보고 학생 취사를 담당하여 재정문제를 해결하기도 하고, 자비로 장학금을 지급하거나, 외부의 주요 관계자를 설득하여 학교 재정을 독립하고 건물 설립을 얻어내는 등 진취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였다. 또한 학사학위와 석사학위를 취득하여 스스로를 개발하는데도 노력하였다.
박명자는 1966년 서울대학교병원으로 돌아와 교수로 함양한 연구능력을 기반으로 간호인력 문제를 해결해 나가고자 노력하였다. 간호인력 확보를 위하여 분석적 연구를 한 후에 정부 관계자를 설득하여 간호사의 3교대 근무와 간호감독 제도가 시작될 수 있게 하였고, 간호조무사 배치와 업무도 개선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간호행정 논문이 본격적으로 발표되기 시작한 것이 1970년대라는 점을 고려할 때, 1960년대에 간호인력 확보를 위하여 업무분석을 하고, 간호조무사 업무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 것은 커다란 진전이었다. 또한 고려병원의 초대 간호과장으로 교육감독제를 시작하고, 간호인력 충원과 보수규정의 객관적 기준을 마련하는 등 간호관리자의 능력을 발휘하였다.
1972년에는 고등학교 교련교사로 중등교육에 새로이 발을 내딛고 불과 1년 전에 만들어져 내용이 미비했던 교련과목에 전시상황에서의 구급간호라는 내용 개발에 기여하였다. 그 외에도 학교에 직업반을 만들어 졸업 후 자립할 수 있도록 하고, 재일교포학생 하계단기교육 지도교사로 활동하는 등 폭넓은 교육활동을 하였다. 박명자가 고등학교 교사이면서 직업반 학생들에게 뜨개질을 하게 하여 그 수익금을 적립한 개인 통장을 졸업할 때 주어 경제적으로 자립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한 것은, 일제시대 간호사이자 산파였던 정종명이 1922년에 ‘여자고학생상조회’를 조직하여 공동생활하며 양재로 수익을 내서 경제적 자활을 모색했던 활동(Yi, 2012)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누구가 고등학교 교련교사인 박명자에게 이걸 하라고 요구했던 것이 아니라 박명자 자신이 학생의 요구를 파악하고 자신의 역량을 활용하여 돕고자 했던 것이었고 이는 간호대상자를 사정하여 진단하고 간호사 자신의 역량을 최대 활용하여 대상자의 자기간호가 가능하도록 한다는 간호의 기본에 가장 부합한 것이었다.
1985년 방송통신대학교 교육연구관이 되자 간호계의 숙원사업인 간호교육 일원화가 앞당겨질 수 있도록 간호학사학위 취득을 위한 방송통신대학 내 편입과정 개발에 앞장섰다. 당시 3년제 간호과를 졸업한 간호사가 간호학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도록 독학사제도와 편입학 제도 등이 있었지만 문이 매우 좁았고, 많은 간호사가 방송대의 이런저런 학과에 편입학하여 학사학위를 취득하는 상황이었다. 박명자가 대한간호협회의 지원을 받아 수행한 연구(Park, 1985-a)가 이론적 기반이 되어 방송통신대학 보건위생학과에 3년제 간호과 졸업생인 간호사가 편입학하여 간호학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는 간호학 전공이 만들어졌다. 이로써 우리나라 간호교육이 학사학위 취득으로 일원화되는 가장 큰 물꼬가 트일 수 있었다.
박명자는 중학교 교장이 되자 직장내 보육시설이 거의 없던 우리나라 최초로 교사 자녀를 위한 학교내 보육시설을 만들었다. 1998년 은퇴 이후에는 1950년대 후반에 시작하여 지속해온 자원봉사에 더욱 헌신하였다. 특히 임종 환자를 위한 호스피스 봉사, 어려운 이웃을 위한 무료 옷 만들기 봉사, 관절염 환자를 위한 타이치 운동 봉사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박명자의 봉사하는 삶은 여든 네살인 2015년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결론 및 제언
1932년에 태어난 박명자는 서구식 교육과 종교를 받아들인 집안에서 성장하여 당시 한국 여성으로서는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한국전쟁이라는 위기와 격동의 시기를 간호학생이자 간호장교로 겪으며 남다른 박애정신과 소명의식, 그리고 결단력과 추진력을 갖추게 되었고, 이는 이후 박명자의 삶과 일에 영향을 미쳤다. 박명자는 1998년 은퇴하기까지 반세기를 임상 간호사로, 간호학 교수로, 간호관리자로, 중등학교 교사와 교장으로, 장학사로 교육과 실무의 현장에서 일하였으며, 가톨릭 신자로서의 활동, 전문직 단체 활동, 그리고 자원봉사도 힘써 병행하였다. 박명자가 활동한 20세기 후반의 한국은 사회 전반과 간호환경이 급변하며 성장하였고, 간호교육과 실무의 현장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박명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적극적으로 간호현장이나 대상자의 요구와 문제점을 파악하였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는 기존의 통념이나 역할 구분을 뛰어넘어 창의적으로 사고하여 해결책을 고안하였고 자신의 역량을 최대로 활용하면서 몰입하여 헌신하였다. 이러한 박명자의 헌신은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1991년 나이팅게일기장을 수상하게 되었고, 82세인 현재도 자원봉사하는 일상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한국전쟁이라는 위기의 경험에서 초석이 다져져 65년간 이어지고 있는 박명자의 간호사로써의 삶은 창조성과 개척정신을 통해 공중보건 및 간호교육에 기여한다는 나이팅게일기장의 이념에 가장 부합하는 것이었다.
박명자가 간호사로 교육받고 활동했던 전쟁과 경제성장의 시기를 지나 오늘날의 한국은 평화와 안정을 누리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교육받고 활동하는 오늘날의 간호학생과 간호사가 진정한 주인의식을 가지고 간호과정을 적용하며 창의성을 발휘하도록 하려면 간호교육과 실무에서는 어떠한 교육과정과 실무환경을 제공해야 할 것인가는 향후 연구의 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